[단독] “조국을 위해 젊음을 불살라버린

            HID 소년대원들, 그들은 누구였나?”<상>

한영봉 지회장
한영봉 지회장

특수임무유공자회 한영봉 파주지회장, 소년HID대원 활동밝혀

파주 ‘특수임무 제1지대전사자 전공비’, 소년HID대원들 추모

[편집자 주] 아래 보도 내용은 6.25 한국전쟁이 기록된 관련 전사(戰史)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으며 특히 6.25 전쟁 시 육군본부 정보국 3과에 소속 돼 동해안에서 HID 활동을 벌였던 우종환 회장(36지구대 북파공작원 출신들로 구성된 4863부대 36동지회 회장)도 자료를 제공했음을 밝힘.

[정경시사Focus=류재복 대기자] 지난 5월 2일, 파주에서 ‘특수임무 제1지대 전사자 전공비 추모제’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특수임무유공자회 경기도지부 파주시지회 한영봉 지회장은 “먼저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시다 이 지역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선열들의 영전에 머리숙여 명복을 빈다”면서 “이 지역은 6.25전쟁의 치열했던 격전장으로 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역사의 현장으로 선열들이 남기신 업적과 발자취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 지회장은 “특히 이곳에서는 계급도 군번도 없는 소년병들이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음을 알고 진정으로 조국을 위해 온갖 고난을 극복하면서 오로지 조국수호에 앞장 섰으며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젊은 청춘을 바치신 선영들의 위국헌신 정신은 현재의 우리들이 영원히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위대한 가치로서 그 고귀한 희생에 다시금 한없는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바친다”고 말했다.

이날 한 지회장이 추모사에 밝힌 1지대는 당시 1사단 HID로소속으로 소년공작대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소년공작대원 27명중 11명은 평양 앞섬(쑥섬)에서 11명이 전사를 했는데 아직도 이들 유해는 찾지를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외에도 파주지역 3개리 출신들로 42명이 6.25전투에 참가를 했다. 이들 소년대원들은 주로 판문점 주변에서 공작 첩보 활동을 했다. 잠시 판문점의 역사를 짚어본다.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고 평화의 상징이 된 판문점. 판문점은 남북이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9.19 군사합의)」이행 과정에서 '비무장화'되어 다시한번 평화의 상징이 됐다. 2019년 5월 1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남측 지역 민간인 견학이 7개월 만에 재개되고 남북 정상이 산책도 하고 대화한 도보다리와 공동 기념식수 장소도 민간에 개방되었다. 이제 판문점에서 방탄헬멧을 쓰고 권총으로 무장했던 경비병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한반도의 군사적 대립을 상징하던 공간인 판문점은 지금 평화의 현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6.25당시 유엔군과 공산군이 회담을 했던 판문점
6.25당시 유엔군과 공산군이 회담을 했던 판문점

판문점 원래이름은 '널문리 주막마을' 중공군 때문에 ‘板門店’

판문점 주변에서 大小사건 벌리면서 위세를 떨친 소년HID

판문점의 원래 이름은 '널문리 주막마을'이었다. 왜 '널문리 주막마을'이 '판문점'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6·25전쟁 직전까지 널문리는 경기도 서북쪽에 위치한 농촌 마을이었다. 조용한 농촌마을 이었던 널문리는 이곳에서 6·25 전쟁 휴전협상이 이뤄지면서 유명해졌다. 그렇지만 휴전협상이 널문리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6·25전쟁을 중단하기 위한 첫 번째 예비회담은 1951년 7월 8일 개성 북쪽에 위치한 '고려동'에서 개최됐다. 이후 휴전협상은 같은 곳에 위치한 '내봉장'에서 20여 차례 열렸는데, 내봉장 주변에서 북한군의 무력시위가 계속되자 UN군측은 북측에 회담 장소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UN군측의 제안에 북측은 널문리 주막마을을 새로운 회담 장소로 제안했고, 1951년 10월 22일 UN군과 북측은 널문리 주막마을에서 천막을 치고 연락장교 접촉을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휴전회담에서는 한국어, 영어, 중국어가 공용어로 사용됐고 이에 중국 측 대표들도 찾아올 수 있도록 '널문리 주막마을'을 한자로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이름이 바로 '판문점'이다. 판문점은 한자로 '板門店'인데 여기서 '板(판)'은 '널조각'을, '店'은 '가게, 주막'을 의미한다. 즉, 널문리의 '널'을 '板(판)'으로, 주막을 '店(점)'으로 옮긴 것이다.

「정전협정」 체결이후 판문점 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지나갔지만 다른 지역들과 다르게 군사분계선을 의미하는 철책이 없었기 때문에 쌍방 군사정전위원회 관계자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남북을 오갔고, 양측 장병들도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휴전협정 전 이곳 판문점 주변에서는 6.25로 시작된 아군과 적군 간에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았다.

1951년 8월 19일 오전 5시 55분, 개성 중립지역의 경비 임무를 맡고 있던 중국지원군 제47군단 제139사단 헌병 9명이 소대장 ‘야오칭상’의 인솔하에 판문점 서남쪽의 송곡리 북쪽 고지대에서 동쪽으로 순찰을 돌 때 불법적으로 중립지역에 진입해 사전에 숲 속에 매복하고 있던 한국군 30여명의 갑작스런 사격으로 소대장 ‘야오칭상’과 소대원 ‘왕렌위안’이 중상을 입었다.

6.25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백선엽 대령
6.25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백선엽 대령

 

소년 HID 대원들, 판문점 중국지원군 소대장 총격 사망 시켜

판문점 교량 부근에서 교량 봉쇄 비무장 공산군에게 사격 가해

이어서 한국군은 다시 중상을 입은 ‘야오칭상’의 이마에 두 발을 계속해서 쐈고 ‘야오칭상’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바로 중국지원군 소대장 ‘야오칭상’을 사망케 한 것은 아군의 소년공작대원들이었다. 사건 발생 후 북한과 중국측의 요구에 따라 쌍방 연락관이 즉각 사건 현장에서 조사를 벌렸고 현지 주민과 북한과 중국 측 경찰의 증언, 그리고 사건 현장의 물증들은 사건의 진실성을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북한과 중국 대표단 수석대표 남일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측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미국측에 ‘야오칭상’을 죽이고 ‘왕렌위안’에게 상해를 가한 흉수(두목)를 엄하게 처벌할것과 중립지역 협의를 위반하는 어떤 사건도 재발하지 않도록 보장을 요구했다. 이에 앞서 8월 13일에는 “판문점 교량 부근에서 40여명의 유엔군 부대가 교량을 봉쇄하고 비무장 공산군에게 사격을 했다”고 항의를 했다.

이에 유엔군 측은 “전자에 대하여는 사전 통고가 없었으며 후자에 대해서는 조사 결과 그때 그곳에는 유엔군 부대가 없었다”고 반박하였다. 사실 이때도 소년공작대원들이 북한군들에게 사격을 한 것이었지만 유엔군측은 모른다고 한 것이었다. 이처럼 사건이 발발하자 양측의 연락 장교들은 중립협정을 보완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를 보완하고 있을 때 중립지역에서 사건이 또 발생했다. 8월 19일 중립지역인 송곡리 (판문점 서쪽 1km지점의 중립지역)에서 중공군 헌병소대가 순찰 도중에 습격을 받아 소대장이 사망하고 소대원 1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역시 우리측 소년병 공작대원들이 저지른 것이었다. 이에 북한군 측은 즉각 유엔군 측에 중립협정을 위반하였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유엔군 측의 조사결과 그 시간에 송곡리 근처에 유엔군 부대는 없었다. 그런데 민간인 목격자에 의하면 “중공군을 기습한 대원들 중에는 주로 민간복장을 하고 있었고 체격들이 좀 작고 이전에도 나타난 적이 있다”는 증언을 들었다. 이에 유엔군 측에서는 이들이 대한민국에 우호적인 유격대원들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판단을 했는데 바로 그들이 소년병 HID였다. 하지만 북한군 측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이 사건을 그들의 선전 공세에 최대한 활용하였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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